memo...
03
화면은 그 소멸 없는 교체가 흔적을 남기는 장소가 되고, 그 장소에서는 선과 후의 시간적 위계 없이 모든 것이 동일한 무게로 공존한다.
지워졌어야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것, 찌꺼기들이 그림에 불쑥 돌아오는 방식은 악몽을 닮는다. 환상이 이미지적인 것이라면, 악몽은 몸으로 겪는 것- 깨어났을 때의 신체적 압박감, 비논리적인 장면들이 오직 하나의 시각적 인과만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이어진 뒤, 그것이 지나갔을 때 뒤늦게 느껴지는 서늘함에 집중한다. 흘러간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았을 때, 그 비이성적인 연결은 여전히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이제는 덮여서 보이지 않는 원본의 형상을 마저 잃고 싶다는 욕구와 균열이 이뤄내는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다는 충동 사이에서, 화면은 서로 닮은 것들을 계속해서 소환하고, 계속해서 집을 짓고, 계속해서 배의 판자를 바꾸지만 그 여러가지 과정을 지난 여러 것들을 옆에 남겨둔 채로, 끝내 완결되지 않는다.
06
보이는 것은 하늘과 지평선 끝 뿐인 광활한 들판에 서 있다고 생각해보자. 가만히 있으면 없어지고 마는 내 몸의 무게는, 이번에는 발목께에서 계속 스치는 연한 풀들 덕에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을 보고 누우면 잘잘한 풀과 사이사이 조그맣게 피어있던 노랗고 파란 작은 들꽃들이 나를 감쌌는데, 그 작은 틈새로 지나다닐 작은 생명체, 이를테면 개미나 풀벌레들이 내 몸의 작은 구멍들로 들어오거나 짓눌려 뭉개질지도 몰라 두렵기도 했다. 자는동안 나도 모르게 벌린 입 사이로 먹어버린 벌레의 개수를 세아려 보면서도, 입을 거쳐 밖으로 다시 나가다가 죽을 벌레들은 그래서 식도나 장기 속에서 그들이 과연 포근함을 느꼈을지 생각해본다. 방에 깔았던 녹색 카페트는 그 들판과 색과 피부에 닿는 직물의 온도 정도가 비슷했는데, 나한테 들어오게 될지 고려해야 하는 작은 생명체들은 없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 풀밭에서 나는 편하지만 불편한 채로 몸이 굳어 일어서지도 못하고 온 몸에 힘을 주고 누워있어야 하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그 초록색은 그래서 그냥 아주 좁은 수건인 것이다.
손으로 만진만큼 벽이 생기고, 바닥에 구른만큼 바닥이 생긴다. 그 방의 모양은 언제나 늘상 다르다. 그렇게 해서 다시 얻어낸 내 몸은 어느새 갈색 바닥, 초록색 카페트, 끊임없이 이어지는 벽을 가진 방과 다르지 않았다. 마주친 들판은 방 안에 있었고, 그래서 결국 내 몸 안에 있었다.
섞여 뭉쳐진 초록색들은 완전하게 섞이지 못해서 색의 찌꺼기를 남긴다. 방은 변화하는 하늘의 색을 따라 시간 속에 있고, 가끔은 그냥 어떤 색을 가진 벽의 안쪽이다. 방, 수평 방바닥에서 돌출한 침대, 수직 벽에서 함몰된 창문, 그리고(그래서) 나는 납작했다가, 공간에서 x, y, z축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어떤 것으로 튀어나왔다가, 여기 있었다가 없다. 초록 들판, 어쩌면 길게 연결된 채로 계속 달라지던 방의 연녹색 벽, 굴러다니던 납작한 바닥들과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작은 개구리와 원숭이. 그건 내 몸 때문에 있었다가 없어지고 다시 생겨난다. 그래서 계속해서 분할되고, 접합되고, 잘못 붙어버리기도 하고, 잘못 늘려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림들은 하나였다가 그어진 세로 선을 따라 계속 쪼개지기도 하는 연속체가 된다. 다시 보고싶었던 기억 속의 방은 어차피 같아지지 못하고, 과거의 그 모난 감각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다시 한번 볼 수 없다는 건 꽤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생겨먹었든 벽은 벽이고 이불은 이불이니까. 어쩌면 방에 놓였던 원숭이나 개구리의 작은 몸통을 쥐고, 꼬리 끝을 만질때 다시 만들어지는 방은, 그게 진짜 지금 이곳에 있는 방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방은) 닮아지고 싶은 마음을 아예 놓아버릴 수 없다.
05
이상하게도 그 다른 모든 방들은 하나의 방이었고, 창 밖의 풍경은 하나의 풍경이었다. 좁고, 단순한 벽에 둘러쌓인 초록색 카페트는 늘 나의 소유였고, 확대되지 않아야 하는 다섯 평 정도의 방이었다. 그 공간은 그냥 태고의 순간을 재현해주는 은신처였고, 좁으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넓고 아늑한 이상한 공간이 된다. 기억 속에 있던 과거의 방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에서 그것은 나 혼자만의 추억과 상상이 되어, 은밀한 비밀로 간직되는 것이다. 방들에 대한 그림의 묘사는 절대 공간을 특정짓지 않는 모호한 상태로만 지속된다. 비밀은 영원히 땅 속에, 카페트 밑에 묻어져 어슴푸레한 상태로 머물러야 한다. 오로지 기억에 의존하는 공간의 재현은 그래서 이 각도였을수도, 저 각도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 색이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이 색은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미지로 기억한 방의 모습은 그것이 내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습도 저 모습도 될 수 있다. 기다란 복도를 걸어가면서 보는 벽은 계속해서 달라지며 복도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고, 동그라미 카페드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봤던 오각형 방의 벽은 절대 끝나지 않는 파노라마처럼 연결된다. 걸어가거나 빙글빙글 돌거나, 앉았다 일어나는 내 움직임의 규칙은 벽이나 방의 모습을 평면화 하였고, 그렇게 평면화 된 방은 특정한 방을 묘사하지 않고 그저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 태고의 집이 되었다.
12
마찬가지로 멀리까지 뻗은 복도의 끝이나 작게 보이는 계단의 끝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아주 조금 움직이면, 원래의 시선에서 아주 살짝 벗어나면, 공간을 이루던 선의 각도와 면의 모양은 너무 빠르게 변해버려서 아주 다른 것이, 다르게 느껴지는 공간이 된다. 역시 단 일 밀리미터도 같은 것이 없다 (그런데 원숭이 인형의 원숭이는 손으로 얼굴을 쥐어 짜도, 엎어져도, 나한테 깔려 눌려도 늘 웃고있었다). 어쨌든 그 세밀한 풍경은 내가 나를 둘러싼 사방의 면 중 어느 것에 가까워지느냐에 따라 계속해서 변한다. 그리고 나는 기억 속에서 서있거나 누워있거나 앉아있었던 복도, 방 안, 계단 위에서 내가 네 개의 면 중 어디에 가까웠는지를 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아서 걸어가기를 주저하던 길게 뻗은 복도의 기억은 하나의 점으로 모여드는 선들로, 선들이 이어낸 면들의 모양으로, 창문 끝에서 밀려오던 푸른 빛이 섞이던 벽과 바닥의 색으로 만들어졌다. 대략 몇 도의 각도를 가진 선, 대략 어떤 색을 가진 면의 대략적인 크기. 공간은 그 짧은 순간의 모습을 번역한 수치와 글자로 머릿속에 기억된다.
캔버스를 마주하고 내가 기억하는 쭉 뻗은 선을 기억 속 바로 그 각도로 긋기 위해서, 붓을 따라가면서 위아래와 양 옆으로 움직일때, 내 기억은 오로지 하나였지만, 화면을 앞에 둔 나의 위치에 따라, 시작점에서 캔버스를 바라보며 그은 각도와 끝지점에서 긋고 만 각도가 계속 달라지고 휘어진다. 캔버스에서 몇 걸음 뒤로 떨어져서 다시 정확한 각도를 확인하고, 다시 캔버스에 가까워진 다음, 다시 붓을 따라가면, 이번에도 조금 전과 다른 각도의 선이 그어진다. 내가 기억하는 공간을 이루고 있던 정확한 각도의 선을 그으려고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화면에 붙은 채로 평행하게 내 몸보다 큰 화면 앞을 아주 조금씩 움직이면서 팔 끝의 붓을 따라다니는 한 그것은 성취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가만히 있을때의 기억은 왔다갔다 움직이면서 그려진다. 동그란 카페트를 기억하기 위해 동그랗게 돌려대는 팔은 움직일때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동그라미를 남긴다. 기억 속 그 곡률을 그려내기 위해 계속 생겨나는, 그어지다 만 동그라미가 화면에 남는다. 팔은 계속 돌아가고, 나는 그 동그라미가 기억 속 동그라미가 맞는지 계속 앞으로 뒤로 왔다갔다 움직인다. 다시 보고싶었던 그 공간은 내가 만들어내는 평면 위에서, 이렇게 공간은 없고 오로지 선의 각도와 면의 크기와 색의 집합이 된 그림이 된다. 그렇게 그려지면서 쌓이는 물감의 겹은 매 순간 분화되었다가, 겹의 여러 면이 하나가 된 채로 정지한다. 설산을 바라보던 창문 앞에서, 바람 한 톨 새지 않게 꾹 닫힌 창의 틀을 바라보면서, 이 창틀은 기성품이라 이렇게 여러 홈이 유격없이 딱 맞게 닫힐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 창틀을 그리겠다고 붓질을 하다보면 기성품의 단단하고 차가운 창틀은 없고 그냥 부들거리는 선들을 차곡 덧그린 모양새다. 내 기억은 그렇게 빠른 순간에 사라진다. 그림을 끝맺을 땐 처음의 공간은 없다. 화면은 그렇게 출아한다. 잘못 그은 선과 기억과 닮게 그려진 선이 뒤섞여 남는다. 잘못 그었던 선은 더해져서 새로운 면의 모양을 만든다. 붓질이 더해지고 시간이 쌓이면서, 면은 나눠지고, 선은 여러 겹이 되고, 물감은 이미 칠해졌던 것과 섞여 다른 색이 된다. 그렇게 하나의 기억에서 시작했다가 끝 맺어진 화면은 ‘이건 어떤 풍경, 어떤 공간, 어떤 대상이다’라고 말하기에는, 기억을 투영해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에도 너무 멀어졌다. 다시 내 이야기에 대응하는 어떤 이미지로 여겨버리는 건 너무 주제넘은 짓이다.
활자로 전개되며 제거된 기억의 일부는, 그 기억을 닮기 위해 캔버스에 계속해서 덧그려진 면과 선으로 새롭게 뭉쳐지고, 초점 잡히지 못한 채로 서로 결합한다. 원숭이는 움직이는 화면에서 혼자 고정된 채로 화면 앞의 나를 마주본다. 화면은 흐릿하거나 뚜렷하고, 그 안에서 여러 개로 보이고 서로 섞이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는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림에서 형이 해체되어서 너덜거리게 된 어떤 것은 그래서 완전해진다. 그래서 영원히 멈춰 있을 풍경은 실은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그림의 거리는 나와 좁혀질 수 없다.
12
꾸물거리는 날벌레가 영원히 멈춘 것 같은 공간에 시간을 가져오는 것처럼, 찌꺼기는 화면에 달라붙어 내가 만들어내는 기억에 공간-시간의 오차를 보탠다. 방을 재현하려는 의지가 없는 붓질, 직선, 색깔. 내가 찌꺼기라고 부르는 화면 위의 것들은 그려진 형상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에 제동을 걸고, 화면에는 오차나 오류, 렉으로만 여겨져서 삭제되었던 것이 다시 불러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