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때때로 나는 원숭이에 너무 많은 것을 투영해서,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투영하지 못해서,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읽어
내린다. 원래의 원숭이 인형에게는 큰 눈알이 붙어있다. 그런데 결국 내 원숭이는 눈이 작아졌다. 이미지는 대상에 봉
사하기보다는 배신하는 것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작은 인형들은 이미 낡았다. 그들이 짊어진 사소한 이야기들이 내 머릿 속에 선행된 까닭이다.
흘러가는 시간은 쌓인다. 그려진 동그라미에 덧칠해진 물감이 쌓이고, 직전 하이에나의 잔상이 쌓이고, 동그란 궤적으로 걸어가는 당신 신발의 먼지가 쌓이듯이, 흘러가는 당신의 생각도 쌓인다. 빙빙 돌아가는 바닥에서 축을 고정하고 선채로 내려다본 바닥은 그것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바닥에 깊게 박혀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것은 그저 머릿속에서 부유한다. 어떤 작은 원숭이와, 어떤 작은 사람과, 그리고 잠시 쉼표. 그리고 어떤 작은
별, 그리고 어떤 작은 하이에나의 꼬리는 그 안에서 반짝거린다. 부유하는 당신의 동그라미는 계속해서 원숭이를, 작은 사람을, 작은 별, 작은 하이에나를 서로 겹칠 것이다. 그리고 전부 뭉개버린다.
형이 온전하게 보임에도 다른 상상을 덧씌울 수 있지만, 굳이 추가하는 선과 굳이 추가하는 흐린 형태의 무언가는 궁극의 덩어리를 빚어내기 위한 으깨기 같은 것이다.
(2023.09)
원형의 물빠진 연녹색의 카페트가 바닥에 깔려있다. 타이치 운동 프로그램은 신체적 기능 향상과 자아 존중감
향상, 개인의 사회적 행동 증가 따위에 도움을 준더랬다.
아무튼 나는 동그라미 카페트 위에서 계속 움직였다.
꺼끌한 수천개의 돌기가 발바닥과, 이어서는 피부와 맞닿고 나는 이어졌다가 이내 떨어진다.
동그한 눈동자와
동그란 홍채를 마주할 땐 그 앞의 투명하지만 흰 각막을 상상하고 그 동그라미 속에 있는 검은 사람이었다가 나
는 흰 벽에 가로막힌 안보이는 흰색 면이 되기도 한다.
팔다리를 맞대고 늘어져 연결된 테이블에 앉아있다. 일렬 종대 속 좌표를 부여받은 몸은 버리고 원 속에서는
가능성으로만 떠다닌다
카페트위에 몸을 올려놓은 난 부유감을 느끼면서 다리로 바닥을 더듬는다.
약속을 먹고 도모는 자란다. 내가 들어있는 사람들이 이룬 원을 조각난 모습으로 쪼갠다. 사실 붙인다. 이미 조각난 약속을 도모가 붙여낸다
(2022)
어차피 소화될 거 왜 음식 먹냐는 질문은 유의미하다. 어차피 다르게 이해할 거 왜 이해하려고 하느냐는 질문과 맞닿아 있어서. 공허함만이 결국 남게 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꺼내고 헤집어서 그것이 남기는 자국들을 애써 따라가보려는 시도는 퍽 낭만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의미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미묘한 시공간의 뒤틀림으로
끊임없이 갱신되는 나/너/우리/그들/그것의 세상에서, 이들이 부정되고 동시에 재인지되며 엉킨 존재들을 생산해내는 것이 우리가 하는 혹은 할 일이라면 내가 도모를 만나는 것은 지속되어도 괜찮은 취미일 것이다. 결코 생산적이지는 못한 심리적 육체적 노동의 반복이 삶의 의의라면 나는 어떤 정서로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 기한 없는 노동 속에서 그저 시각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의내리기의 행위가 가지는 정의에 대한 의심 속에서 만들어질 시각적인 것들과, 단어의
가능성을 열어 둘 방법, 사이에 얇은 균열을 작동시킬 방법을 찾으며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